한국족보정보 : Genealogy Of Korea (G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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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름(書名) 평창이씨사직공파보平昌李氏司直公派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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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연도 1983
소장처 유타계보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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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인증
암호
사직공파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상시공파가 아닌가요? 다음을 클릭해 보세요. http://www.pclee.co.kr/img/download/world.pdf
갈까마귀가 황해도 금천군 외류면 마우리에서 씀 ☞ 덧글
(이용석박사)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평창이씨 사직공파 이용석입니다. 23년간 연세대학교에 근무하고 2016년 65세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 현재는 여러가지 사회봉사활동과 개인취미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 중에는 출장강의와 국민권익위원회 청렴강의 그리고 호루라기재단과 공익제보자 모임등이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서 여생을 우리 평창이씨 사직공파의 발전과 중흥을 위하여 노력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점박이올빼미가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진실리에서 씀 ☞ 덧글
평창이씨사직공파신계종친회 카페주소 http://cafe.naver.com/kkareureu
유령실고기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면 훈리에서 씀 ☞ 덧글
(신계6대회장 이항석)종친회가 1985년 설립 형권종친댁에서 제1회종친회 개최 후 32년을 유지 발전해오고 있습니다. 저희 황해도 신계군에는 8개면이 있는데 신계군에서 씨족사회가 번창하여 고향 신계종친회를 유지하는 성씨는 평창이씨, 이천이씨, 반남박씨, 경주최씨 등 4개종친회 밖에 없습니다. 고향 신계에 4개종친회만이 신계를 거점으로 하는 토종 씨족사회의 산물이고 나머지 고향사람들은 타지에서 들어온 분들이 많아 토종씨족을 근간으로 한 신계종친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 平昌李氏司直公派 新溪宗親會"를 대를이어 존속시키고 발전 시켜야 하겠습니다. 이번에 회장단에 변화를 주면서 총무에 창권종친 어르신의 손자인 영석씨가 총무를 맡기로 하였습니다. 젊은사람을 등용하여 종친회가 활력이 생기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것입니다. 새 회장단에서는 발전하고 많은 종친들이 참여하는 축제같은 종친회가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西紀 2017年7月8日 李恒錫 拜
바다사자류가 경상남도 통영군 사등면 오량리에서 씀 ☞ 덧글
(신계5대회장 이찬도2)우리 종친회의 2대 회장을 지내신 고 이찬용(故 李燦龍)씨가 ,신계군지(新溪郡誌 1988년 발간)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신계군에 처음 들어와 사신분은 윤휘할아버지의 조부되시는 명철(明哲)할아버지 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명철할아버지와 그 아들들의 묘소가 모두 신계군 남쪽의 금천군(金川郡)내에 소재해 있어서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물론 이찬용씨는 어떤 확실한 근거가 있기에 그러한 글을 남겼으리라 사료되나 이를 확인할만한 자료를 구해볼수 없는것이 유감이다. 어쨌든 앞에 말한 윤휘할아버지의 아를, 손자며 그 후손들이 다율면과 인접한 다미면 일대에 무수히 분포되어 있음을 볼 때, 우리 선조들께서는 조선시대 중엽인 16세기 이후 신계땅에 대를 이어 살아오면서 깊숙히 뿌리를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평창이씨는 이 고장의 유력한 토반(土班)으로 성장하여 8.15 광복때까지 지역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끝으로 종친회원님들 가정에 한결같이 행운이 깃들기를 빌면서 안사말씀에 대할까 합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부디 건강하십니오. 西紀 1997年10月10日 李燦道 拜
바다사자류가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씀 ☞ 덧글
(신계5대회장 이찬도1)신계군은 황해도의 동북부에 위치하여 강원도 이천군(伊川郡)과 경계를 이루고 황해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곡산군(谷山郡)과 접해있다. 동쪽의 험준한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 서쪽의 멸악산맥(滅惡山脈)에 둘러싸인 신계군은 산간분지(山間盆地)로서 곡산군과의 접경에 있는 해발 1019m의 덕업산(德業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무수한 산들이 솟아있다. 그래서 예부터 '신계곡산'하면 산골로 유명했으니 우리의 전래 민요가사 속에 들어있는 "신계곡산 머루다래는 얼크러 설크러졌는데..."라는 구절만 보아도 이를 알수있다. '머루다래'란 두뫼산골을 상징하는 대명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계지방은 산골로 유명하지만 그러나 산골치고는 농산물이 비교적 풍부한 고장이다. 신계군의 지형이 북고남저(北高南低)로 되어 있어서 남으로 갈수록 산들이 낮고 평지가 많다. 더욱이 예성강의 지류가 군내의 곳곳을 흘러 내리면서 그 기슭에 기름진 들판을 형성하고 있으며, 또한 '미루'라 불리는 평원지대(平原地帶)가 여러곳에 분포하여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는것이다. 신계의 이같은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이름난 특산물은 없지만 쌀을 비롯한 오곡백과가 골고루 산출되어 사람살기에는 아주 좋은곳이고 따라서 인심도 후하였다. 필자의 어릴적 기억에 의하면 우리집 사랑방에는 수시로 한두명씩의 낮선길손이 묵어 갔으나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인심은 광에서 난다고 그만큼 신계는 산골이면서도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신계'라는 군명(郡名)은 고려시대의 신은현(新恩縣 : 現 新溪郡의 南部)과 협계현(俠溪縣 : 現 新溪郡의 北部)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 두현을 하나로 묶어 신계라고 이름을 고쳤는데 이 명칭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우리 선조들께서 신계땅에 옮겨와서 사시게 되었을까? 평창이씨 족보를 살펴보면 시조 광(匡)할아버지의 17세손이신 윤휘(允輝)할아버지의 묘소가 신계군 다율면 송릉리 점점동에 소재하는바 이것이 신계군내에 있는 평창이씨 무덤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윤휘할아버지는 찬(燦)자 돌림의 17대째 되시는 분이다. 족보에는 그분의 생몰연대가 적혀있지 않으나 앞뒤기록으로 미루어 15세기말에 출생하여 16세기 중엽쯤 서거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윤휘할아버지야말로 신계군 최초의 평창이씨라고 볼수 있을까?
바다사자류가 전라남도 순천군 동초면 장양리에서 씀 ☞ 덧글
(신계4대회장 이찬인)多事多難했던 丙子年은 물러가고 희망찬 丁丑年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送舊迎新의 季節이 되면 지난날이 回想되고 鄕愁에젖는 것이 人之常情인가 싶습니다. 故鄕을 떠나온지도 어언 半世紀가 지났건만 북녘에 남아있는 家族과 一家親戚들의 生死조차 모르고 지내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더욱이 요즈음 極度의 食糧難으로 脫北者가 속출하는 北韓社會에서 그 苦痛이 어떠실까? 언제나 統一이 되어 그분들과 相逢할수 있을까.... 그쪽분들에 비하면 우리 越南民 家族들은 얼마나 幸福한 生活을 하는지 모릅니다. 反共의 決然한 意志로 自由大韓을 찾아와 잦은 고생 끝에 오늘을 다져놓으신 先祖님들게 甚深한 感謝를 드려야 할줄 압니다. 새해에는 모든 會員님들 家庭에 더욱더 幸福이 充滿하기를 기원하면서 宗親會運營 및 會報發刊 에 대하여 몇말씀 報告올릴까 합니다. 昨年 11月 3日 明洞 韓一館에서 개최되었던 定期總會에는 다수의 男女會員들이 참석하여 盛況을 이루어주셨는데 그때 宗親會의 活性化를 위해서 血氣있는 젊은이들을 運營에 참여시키기로 뜻이 모아져 이에따른 組織改編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李赫, 李燦運, 李恒錫, 李榮錫 등 少壯層 네사람을 運營委員으로 選任하였으며 앞으로는 이들 4명을 포함한 運營委員會에서 모든 宗務를 계획,집행해 나가기로 運營體制를 一新하였습니다. 지난 11月 26日 第1回 運營委員會가 召集되어 宗約(宗親會規約) 草案을 立案 通過시켰으며 또한 宗親會報를 만들어 會員 各 家庭에 配布하기로 決定하였습니다. 會報는 年 4回程度 發刊할 예정인데 앞으로 會員相互間의 親睦을 圖謀하고 紐帶를 强化하는데 좋은 구실을 할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會員여러분! 그동안 우리 平昌李氏 新溪 宗親會가 會長本人의 能力不足등으로 會員님들 期待에 副應하지 못했던 것은 事實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本人도 微力을 다하겠지만 새로운 體制下에 少壯委員 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만큼 希望을 가지셔도 좋을 듯 합니다. 會員들께서도 宗親會에 보다 깊은 關心을 가지시고 적극적인 協助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會員님 家庭에 哀慶事가 있을때는 지체없이 本人이나 總務에게 꼭 연락해 주실 것을 당부드리면서 새해의 幸運과 健勝을 거듭빌면서 이만 人事에 가늠하는 바입니다. 西紀 1997年1月1日 李燦仁 拜
바다사자류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특리에서 씀 ☞ 덧글
(신계2대회장 이찬용2)8.15 解放後 民族的 社會觀도 定立되기 前에 急激한 社會 變遷과 西歐物質文明의 無分別한 導入으로 祖上傳來의 美風良俗이 封建的인 舊世代의 弊習視되어 가는 傾向마저 없지 않았으나 近來에 이르러 政府의 施策도 民族的 傳統文化의 繼承發展과 忠孝思想의 涵養및 倫理道德觀의 確立을 爲한 方向으로 定立되어 가고 있음은 晩時之歎은 있으나 多幸한 일이라 하겠다. 아무리 社會가 發展되고 核家族 制度로 變遷된다 하더라도 千技萬葉이 同一歸根(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나무가지와 잎도 그 뿌리는 하나다)이라는 古語의 진리는 東西古今을 莫論하고 人間事會에 있어서도 例外일 수는 없는것이다. 人間社會는 수많은 氏族으로 構成되었으며 氏族마다 역사가 있고 氏族의 歷史를 記錄한것이 族譜이니 譜에 依하여 氏族의 뿌리와 歷史를 알고 先祖의 偉業을 받들며 後孫에게 훌륭한 遺産을 남기는 것이 家門과 宗族을 빛내고 나가아서는 國家와 社會에 寄與하는 길이며 이것이 곧 忠孝인 것이다. 이러한 까닦으로 忠孝의 根本은 尊祖敬宗의 思想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譜를 바탕으로 尊祖敬宗의 思想과 宗親 相互間의 上下系寸을 일깨우고 親睦을 圖謀하며 相扶相助하여 慶賀共祝하고 憂患互救함은 勿論 崇高한 先祖의 偉業을 繼承發展시켜 國家에 忠誠하고 父母에 孝道하는 後孫으로 키우고 자라서 祖國統一이 어느 世代에 가서 이루어지든 故鄕을 찾게 되는 날 故鄕에 계시는 宗親들과 先塋앞에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後孫으로 錦衣還鄕하기를 期待하며 우리 宗親들 앞날에 世世孫孫 無窮한 繁榮과 榮光있기를 祈願하면서 序文에 가름한다. 西紀 1983年 癸亥 3月12日 栗山 李燦龍 謹序 戌
바다사자류가 강원도 철원군 무장면 중세리에서 씀 ☞ 덧글
(신계2대회장 이찬용1)우리司直公派(西紀1958年戊戌譜 以後 常侍公派로 잘못 印刷)의 中始祖이신 諱天驥 할아버님은 文武를 兼備하신 絶世의 英雄으로서 멀리 中國에 까지 名聲을 떨치시었다. 卽 高麗朝 恭讓王의 致命使臣으로 明나라에 가셨을 때에 南蠻의 侵攻을 받아 明國이 危機에 處하자 할아버님께서 明國의 많은 將師들을 젖히고 討伐大將이 되시어 二年余만에 南蠻을 무찔러 크게 功을 세우시니 明朝는 功勞의 보담으로 할아버님께 散騎常侍란 벼슬을 내려주셨다. 그러나 散騎常侍란 官職의 品格은 當時 宗主國格인 明나라에서 우리나라 임금에 對한 官職의 品格과 同一한지라 할아버님께서는 君臣間에 同一한 品格의 벼슬을 받을수 없다고 頑强히 이를 拒絶하셨다. 이에 明朝에서는 할아버님으로 하여금 이 관직을 받으시도록 하기 爲하여 우리나라 임금님에 대한 品格을 一等級 올리는 破格的인 禮遇를 베풀었다. 明國皇帝는 이때 報恩의 表示로 할어버님의 初諱玗를 諱天驥로 이름까지 새로지어 주셨다. 할아버님께서는 國威를 滿天下에 宣揚하시고 歸國하신것은 李成桂가 高麗朝로 부터 國權을 奪取하고 都邑을 漢陽으로 옮긴 直後였다. 할아버님께서는 李太祖로 부터 數次에 걸친 懇曲한 부름을 받으시고도 한 臣下가 어찌 두임금을 섬길 수 있는가 하시고 한사코 不應하시며 二年餘를 隱居하시다가 他界하시니 李太祖는 할아버님의 忠節에 感服하여 平昌君을 追封하시였다. 이와같이 훌륭하신 祖上님을 모신 우리司直公派의 後孫들은 無上의 榮光이 아닐 수 없으며 할아버님의 높으신 信義와 忠節의 精神은 우리司直公派 의 傳統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司直公派는 예로부터 新溪, 金川을 중심으로 黃海道 中南部 地域에 分散 居住하여 왔으므로 新溪, 金川派라고도 한다. 8.15 解放後 國土의 分斷과 6.25 戰亂으로 祖上傳來의 生活터전을 두고 男負女戴하여 避難生活을 하게 된지도 於焉 四十個 異霜, 戰亂의 傷處도 가시고 자손들도 繁昌을 보게 되었으니 이 어찌 祖上님의 恩德이라 아니 할 수 있으랴. 暫時 戰亂만 피하면 쉽게 還鄕하리라 생각했던 紅顔의 避難길이 어느덧 半白이 되었으니 故鄕에 남아 계시는 宗親들은 理念과 制度를 달리하는 劃一社會에서 그 苦楚가 어떠하시며 先朝의 墓所가 제대로 保存이나 되고 있는지 애타는 마음 달랠길이 없다.
바다사자류가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에서 씀 ☞ 덧글
(신계1대회장 이창권)예부터 우리 韓民族은 世界의 다른 어느 民族보다도 父母를 恭敬하고 一家親戚과 友愛로우며 祖上을 崇拜하는 精神이 透徹하였으며, 또 이것을 最高의 美德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近來에 이르러 個人主義思想의 蔓延과 高度의 産業社會化 趨勢에 따라 祖上傳來의 倫理道德觀이나 美風良俗은 나날이 退色 하고있어참으로 안타까움을 禁할수 없다. 時代潮流에 따라서 人間의 思考方式이나 價値觀이 바뀐다 할지라도 父母와 祖上을 敬拜하고 親族間에 和睦하는 人倫의 基本觀念은 變할 수 없다. 民主國家의 올바른 市民이라면 最小限 이와 같은 基本倫理道德觀念은 維持保全해야 할 것이며 人間의 存在意識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人間은 누구나 어떤 運命을 타고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韓國땅에 태어난 韓民族의 一員이자 平昌李氏 의 一門이다. 우리가 韓民族이나 平昌李氏로 태어난 이상 우리에게는 韓民族을 빛내고 平昌李氏를 빛내야 할 使命이 있는 것이다. 民族의 歷史를 記錄한 것이 國史이듯이 氏族의 歷史를 기록한 것이 族譜이다. 우리는 民族의 來歷을 알기 爲하여 國史를 공부하며, 이를 通하여 愛國愛族心을 기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氏族의 由來를 밝히기 爲하여 族譜를 發刊하는 것이며 이 譜를 通해서 崇祖敬族의 精神을 涵養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先祖들께서는 族譜를 氏族의 最高尊貴한 文獻으로 保存하여 왔다. 우리 平昌李氏의 大同譜가 처음 發刊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40餘年前인 西紀1740年(庚申)이었다. 이 庚申譜를 始初로 1919年의 己未譜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의 大同譜 發刊이 거듭되어 歷代宗族의 系譜가 綿綿히 繼承되었으니 先祖들의 勞苦와 精誠에 感謝할 따름이다. 8.15 光復後인 西紀1959年과 그後 두차례에 걸쳐 大同譜의 發刊을 보았으나 漏落이 많았으며 北韓에 계시는 宗親들의 族譜收錄은 面識이 넓으신 元老宗親들의 生存時에 하여야 함으로 서둘러 派譜를 發刊키로 하였다. 이제 北韓에 계시는 宗親들의 銜字만이라도 系統을 찾아 빠짐없이 收錄하였으니 在北宗親들에 對하여도 面目이 서는 것 같다. 薄識非才이긴하나 生存時에 이와 같이 훌륭한 譜의 發刊을 보게 되었으니 餘恨이 없으며 譜發刊費用全額을 負擔하여준 燦龍 從姪과 物心兩面으로 協助 聲援하여주신 宗親들께 感謝드리고 不肖小孫이 譜發刊에 多少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萬幸으로 생각 하겠다. 西紀 1983年 癸亥 3月 李昌權 謹書
바다사자류가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에서 씀 ☞ 덧글
<평창이씨사직공파신계종친회> 南北으로 흩어진 家族들의 居處와 生死조차 杳然한 中에 血肉의 뿌리를 찾아 族譜가 나오게 되었으니 感慨無量할뿐이다. 族譜發刊이 처음 論議된것은 1980年 3月 어느 宗親宅 結婚式 披露宴席上에서였다. 그동안 避難生活에 쪼들리느라 宗親間의 系寸조차 밝혀볼 겨를이 없었던 原因도 있기는 하겠으나 壯年層 以下에서 宗事에 對하여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음을 알게되었고 이대로 가면 통일이 되어 故鄕을 찾게 되더라도 血錄조차 찾기 어려울것이 念慮되어 族譜의 必要性이 切實하였으며 故鄕에 계시는 宗親들 까지 總網羅한 譜의 發刊을 爲하여는 門中에 對한 面識이 넓으신 元老宗親의 生存時에 族譜를 만들어야 하겠으므로 서둘러 派譜를 發刊하기로 하였다. 그로부터 滿 3年만에 譜의 完城을 보기까지 昌權宗親께서는 70老軀를 무릎쓰고 南韓一帶에 居住하고 있는 宗親들을 直接 家家戶戶 訪問하여 調査收錄하여 物心兩面의 犧牲的 努力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族譜의 全家庭 備置를 爲하여 燦龍宗親께서 發刊經費一切를 負擔하여 주심에 따라 어느 문중에도 볼 수 없는 無料配譜를 하게된 것이다. 이렇게 두분 宗親의 精誠이 이제 結實을 보게 된것이니 感謝하는 마음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北韓에 계시는 宗親들에 對하여는 銜字만이라도 系統을 찾아 빠짐없이 收錄하였으며 南北이 統一되어 相逢하는 날에 對備하여 6.25 戰亂時의 住所를 記入하였으니 많은 도움이 될 줄 믿는다. 우리 派宗門의 主系인 新溪系와 金川系를 總網羅한 派譜를 發刊코자 試圖하였으나 相互連絡이 如意치 못하여 不得已 新溪系만을 收錄하였다. 이 譜를 바탕으로 宗親相互間의 上下系寸을 일깨우고 尊祖敬宗의 精神을 涵養하여 紐帶를 敦篤히 할것이며 先祖의 諱字와 行蹟이 收錄된 譜이니 鄭重히 保存하기 바란다. 西紀1983年 癸亥 3月 平昌李氏 司直公派 新溪宗親會 <會長> 昌權 <副會長> 寅鎬, 原燮, 燦龍 <幹事> 鍾權 <總務> 承權
바다사자류가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부윤리에서 씀 ☞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