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선생 (1369 -1439)
허씨(許氏)의 세가(世家)는 경주부(慶州府) 하양현(河陽縣)에서 강안(康安)께서 비로소 족보에 나타나고, 그뒤 대장군(大將軍)유(裕)께서 청렴(淸廉)하고 엄격(嚴格)함으로 세상(世上)에 소문(所聞)높은 집이었다.
선생(先生)의 휘(諱)는 조(稠)요 자(字)는 중통(仲通)이시고 어려서 권문충공(權文忠功) 휘(諱) 근(近)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學文)에 힘쓰고 행실을 닦았다.
태조(太祖=李成桂이성계)가 왕위(王位)에 오른후에 좌보궐지제교(左補闕知製敎)에 명하고 다시 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 하고 육년(六年)후에 성균관전부(成均館典簿)로 옮기었다.
태종(太宗)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 잡단 좌언사(雜端 坐言事)가 되고 좌천(左遷)하여 판관(判官)으로 완산부(完山府)에 복직(復職)되고 얼마 않있다 불러 올리어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있다가 내서사인(內書舍人)에 옮기었다.
세종(世宗)이 왕위(王位)에 오른 뒤에 공안부윤(恭安府尹)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진(昇進)하여 사년(四年)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기고 유월(六月)이 지난 뒤에 다시 참찬겸 세자빈객(參贊兼世子賓客)에 봉(奉)하여 졌다.
세종(世宗)팔년(八年)(명明나라 선덕宣德원년元年)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삼년(三年)후에 승진(昇進)하여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로, 찬성의정부사(贊成議政府事)에 나가고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명년(明年)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겸(兼)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시었다.
세종(世宗)이십년(二十年)에 (명明나라 정통正統삼년三年)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을 배(拜)하고 승진(昇進)하여 좌의정영집현전경연춘추관사(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로 되시었다.
세종(世宗)께서 명령(命令)하여 태학(太學)을 세우게 되었다. 또 선생(先生)은 장계(狀啓)를 올리어
정승(政丞)이된 뒤에 또 사면(辭免)하기를 청(請)하였으나 전하(殿下)께서는 또 허락(許諾)하지 아니하고 명(命)하여 안석(案席)과 지팡이(범장凡杖)를 하사(下賜)하시었다. 그 뒤에 병세(病勢)가 위독(危篤)하게 되자 도승지(都承旨)를 청(請)하여 보내고자 하니 세종(世宗)께서 슬프게 생각하여 도승지(都承旨) 김돈(金墩)을 가보도록 명(命)하였다. 선생(先生)이 좌우(左右)에 있는 사람을 다 물리치고 김돈(金墩)과 나라의 중대사(重大事)만을 말씀하시고 사사(私事)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병세(病勢)가 더하여져 정침(正寢)에서 세상(世上)을 뜨시니 향년(享年)이 칠십일(七十一)이시다.
부음(訃音)이 대궐(大闕)에 들리니 세종(世宗)께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슬퍼 조상(弔喪)하시고 조석때에 수라상에 고기 반찬을 금하고 삼일(三日)동안 조회(朝會)를 받지 아니하였다. 이어서 제수(祭需)를 하사(下賜)하여 제사(祭祀)지내어 조상(弔喪)하시고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 경암선생 (1369 -1439)
허씨(許氏)의 세가(世家)는 경주부(慶州府) 하양현(河陽縣)에서 강안(康安)께서 비로소 족보에 나타나고, 그뒤 대장군(大將軍)유(裕)께서 청렴(淸廉)하고 엄격(嚴格)함으로 세상(世上)에 소문(所聞)높은 집이었다.
선생(先生)의 휘(諱)는 조(稠)요 자(字)는 중통(仲通)이시고 어려서 권문충공(權文忠功) 휘(諱) 근(近)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學文)에 힘쓰고 행실을 닦았다.
태조(太祖=李成桂이성계)가 왕위(王位)에 오른후에 좌보궐지제교(左補闕知製敎)에 명하고 다시 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 하고 육년(六年)후에 성균관전부(成均館典簿)로 옮기었다.
태종(太宗)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 잡단 좌언사(雜端 坐言事)가 되고 좌천(左遷)하여 판관(判官)으로 완산부(完山府)에 복직(復職)되고 얼마 않있다 불러 올리어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있다가 내서사인(內書舍人)에 옮기었다.
세종(世宗)이 왕위(王位)에 오른 뒤에 공안부윤(恭安府尹)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진(昇進)하여 사년(四年)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기고 유월(六月)이 지난 뒤에 다시 참찬겸 세자빈객(參贊兼世子賓客)에 봉(奉)하여 졌다.
세종(世宗)팔년(八年)(명明나라 선덕宣德원년元年)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삼년(三年)후에 승진(昇進)하여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로, 찬성의정부사(贊成議政府事)에 나가고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명년(明年)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겸(兼)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시었다.
세종(世宗)이십년(二十年)에 (명明나라 정통正統삼년三年)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을 배(拜)하고 승진(昇進)하여 좌의정영집현전경연춘추관사(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로 되시었다.
세종(世宗)께서 명령(命令)하여 태학(太學)을 세우게 되었다. 또 선생(先生)은 장계(狀啓)를 올리어
정승(政丞)이된 뒤에 또 사면(辭免)하기를 청(請)하였으나 전하(殿下)께서는 또 허락(許諾)하지 아니하고 명(命)하여 안석(案席)과 지팡이(범장凡杖)를 하사(下賜)하시었다. 그 뒤에 병세(病勢)가 위독(危篤)하게 되자 도승지(都承旨)를 청(請)하여 보내고자 하니 세종(世宗)께서 슬프게 생각하여 도승지(都承旨) 김돈(金墩)을 가보도록 명(命)하였다. 선생(先生)이 좌우(左右)에 있는 사람을 다 물리치고 김돈(金墩)과 나라의 중대사(重大事)만을 말씀하시고 사사(私事)의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병세(病勢)가 더하여져 정침(正寢)에서 세상(世上)을 뜨시니 향년(享年)이 칠십일(七十一)이시다.
부음(訃音)이 대궐(大闕)에 들리니 세종(世宗)께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슬퍼 조상(弔喪)하시고 조석때에 수라상에 고기 반찬을 금하고 삼일(三日)동안 조회(朝會)를 받지 아니하였다. 이어서 제수(祭需)를 하사(下賜)하여 제사(祭祀)지내어 조상(弔喪)하시고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