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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름(書名) 하양허씨세보 河陽許氏世譜, 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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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연도 1984
소장처 유타계보협회
설명 ◈ 하양허씨(河陽許氏) ◈ 시조 : 허강안[許康安] 하양(河陽)은 경상북도 경산군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때에 하주,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개칭하였으며,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하양허씨(河陽許氏)는 고려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강안은 가락국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며, 말년에 호장을 지냈고 하주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으로 개관하였으며 그후 하양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강안의 손자 허작린(許綽麟)이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허신(許愼)은 호부주사, 동정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개성 부윤 귀룡(貴龍)의 아들 주(周)는 우왕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고, 조선이 개국한후 한성부윤,·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 개성유후사유후,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허주(許周)의 동생 허조(許稠))는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두루 역임한후 조선세종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에 밝았던 허성(許誠)은 한성부 판윤 주(周)의 아들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재냈다. 허조(許稠)의 아들 허후(許珝)는 문종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단종때 좌찬성이 되어 황보 인, 김종서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외 중추원 부사 허척(許倜)의 아들 허계(許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양허씨(河陽許氏)는 남한에 총 3,596가구, 14,7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집성촌 경북 경산군 하양읍 금호동 전북 고창군. 정주시 일원 경북 경산군 와촌면 용전리 전북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경남 합천군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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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양허씨(河陽許氏) ◈ 시조 : 허강안[許康安] 하양(河陽)은 경상북도 경산군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때에 하주,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개칭하였으며,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하양허씨(河陽許氏)는 고려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강안은 가락국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며, 말년에 호장을 지냈고 하주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으로 개관하였으며 그후 하양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강안의 손자 허작린(許綽麟)이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허신(許愼)은 호부주사, 동정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개성 부윤 귀룡(貴龍)의 아들 주(周)는 우왕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고, 조선이 개국한후 한성부윤,·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 개성유후사유후,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허주(許周)의 동생 허조(許稠))는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두루 역임한후 조선세종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에 밝았던 허성(許誠)은 한성부 판윤 주(周)의 아들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재냈다. 허조(許稠)의 아들 허후(許珝)는 문종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단종때 좌찬성이 되어 황보 인, 김종서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외 중추원 부사 허척(許倜)의 아들 허계(許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양허씨(河陽許氏)는 남한에 총 3,596가구, 14,7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집성촌 경북 경산군 하양읍 금호동 전북 고창군. 정주시 일원 경북 경산군 와촌면 용전리 전북 진안군 안천면 삼락리 경남 합천군 일원
갈라파고스강치가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에서 씀 ☞ 덧글